시연이네 학교에 놀이마당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놀이마당은 공연, 전시, 플리 마켓 같은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모두 좋아하는 행사였다.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시연이와 동호의 이름을 불렀다. 
“시연이는 책임감이 강하고 동호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가득하니까, 이번에 둘이 반 대표로 놀이마당 행사를 담당하는 운영 위원을 하면 어떨까?”
둘의 시원스런 대답에 선생님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도 모두 힘차게 박수를 쳐 주었다. 1교시가 끝나자 선희가 후다닥 시연이 옆으로 다가왔다.
“오~ 시연 운영 위원님! 완전 멋진데. 아, 그런데 조금 걱정이다. 동호 쟤 완전 거짓말쟁이잖아.”
그러자 시연이가 선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눈을 찡끗했다.
“설마 이번에도 그러겠어? 나도 걱정은 되지만 동호를 믿어 봐야지.”
선희 말대로 동호는 즐겁고 유쾌한 아이였지만,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해 놓고 다음 날이 되면 모른 척을 해서 친구들을 무안하게 만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연이는 이번만큼은 동호를 믿기로 했다.
놀이마당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친 시연이는 다른 반 운영 위원들과 함께 학교 도서관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운영 위원들은 놀이마당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기 위해 오늘 각자 준비물을 가져오기로 한 터였다. 시연이는 가방에서 색 테이프와 색연필을 꺼냈다. 하지만 동호는 눈만 껌뻑이며 앉아 있었다. 
“동호야! 너도 가져온 준비물 꺼내야지. 뭐 해? 어제 네가 가위랑 풀 가져오기로 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랬어! 내가 가져오기로 한 증거 있어?” 
딱 잡아떼는 동호를 보며 시연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때 옆 반 운영 위원인 여름이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녹음 파일을 열었다. 

 

“이것 봐. 어제 분명히 가위랑 풀 가져온다고 했네. 네가 하도 딴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우리 회의 내용을 모두 녹음했어.”
도서관에는 가위랑 풀을 가져오겠다는 동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순간 동호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여름이를 향해 소리 질렀다.
“왜 허락도 안 받고 남의 목소리를 녹음해!”
“허락이 왜 필요해? 내가 너랑 대화한 내용인데.”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제 너랑은 말도 안 할 거야.”동호는 여름이에게 화를 낸 후 아이들에게 인사도 없이 도서관을 뛰쳐나갔다. 

회의를 마친 시연이는 집으로 돌아와 손발을 씻었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거실로 나가자 퐁당이가 이미 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엄마와 이모를 맞았다. 
“표정이 왜 그래?”
엄마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시연이는 낮에 동호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건 여름이가 잘못했어. 허락도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녹음했으니 동호가 당연히 불쾌해하지.”
말을 마친 엄마는 이모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의 말에 동의를 구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모의 생각은 엄마와 다른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여름이가 잘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자꾸 거짓말만 하는 아이는 녹음을 해서라도 증거를 남겨 둘 필요가 있어.”

 

이모가 기대와 다른 반응을 보이자 엄마가 다시 말을 꺼냈다. 
“사적인 대화는 비밀로 남겨 두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사생활 침해야.”
“바로 앞에 두고 한 이야기인데 그게 무슨 비밀이야.”
“그래도 상대의 동의 없이 녹음을 하면 안 돼.”
“언니가 현실을 모르네. 요즘은 통화할 때 녹음이 필수란 말이야.”
“현실은 무슨 현실! 너야말로 사생활의 보호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냐?”
“사생활은 물론 중요해. 하지만 CCTV가 안전을 위해 우리를 촬영하는 것처럼 통화 녹음도 필요한 경우가 있다고.”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모의 목소리도 덩달아 조금씩 높아져 가고 있었다. 
“네 말대로 CCTV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위험한 곳에만 설치돼 있어.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모두 확인할 수 있지. 그런데 여기에서 녹음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다는 게 문제야. 당당하게 녹음할 수 있는 건 모두 사전에 동의를 구하잖아?”
“언니 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상대방의 동의 없이 녹음이 필요한 상황이 분명히 있다고.”
“그 상황이 도대체 언젠데?”
엄마가 계속 하나하나 캐묻자 이모가 답답한지 가슴 근처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당장 우리 앞집의 식당 아저씨를 보면 알 수 있어. 요즘 식당에 전화로 예약하고 오지 않는 손님들이 정말 많대. 왜 안 오냐고 그러면 그냥 물어보기만 한 거라면서 발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야. 하지만 이젠 녹음이 되어 있으니까 끝까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고.”
“맞아! 얼마 전에 학교에서 학교 폭력이 있었는데 통화 녹음이 없었으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을 뻔했어.”
시연이가 손뼉을 치며 이모의 편을 들자 엄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분명히 네 말대로 통화 녹음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 건 맞아.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이 내가 한 말을 녹음해서 협박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언니 말도 맞아. 그러니 평소에 대화할 때 상대를 배려하고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을 하면 안 되지. 대체로 문제가 되는 발언은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아. 따라서 통화 녹음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어.”

 

안녕! 오늘 토론 주제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대화나 통화의 녹음을 금지하는 것이 타당한가의 문제야.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통화를 녹음한 후 이를 공개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안들이 많았어. 최근에 상대방의 동의 없이 대화나 통화를 녹음하면 처벌하자는 법안이 나오면서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단다. 실제 미국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10여 개 주와 프랑스 등 해외에서는 음성권 보장을 이유로 상대방의 동의 없이 녹음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러한 녹음을 법적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야.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에 녹음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단다. 대화나 통화를 녹음한 것은 내부 고발 혹은 공익을 목적으로 하거나 폭언과 갑질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증거로 쓰이기도 해. 그러므로 이를 금지한다면 갑질, 사기 등 범죄에 대한 입증이 어려워질 것이며, 억울한 피해자가 많이 생길 우려가 있단다. 하지만 이러한 녹음은 협박 수단으로 쓰이거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부작용도 있어. 따라서 앞으로 ‘통화 녹음 금지 법안’에 대해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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