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대학자야.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가 6년 만에 과거를 보아 당당히 급제했지.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황소의 난 때는 반란군 두목인 황소를 꾸짖는 글인 「토황소 격문」을 써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어.신라 헌강왕 11년(885년),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배운 학식으로 정치를 잘 해 보려고 온 힘을 쏟았어. 그러나 당시 신라는 매우 어지러웠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하고 백성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도둑질에 나섰어.최치원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가 없게 되자 스스로 태수가 되어 지방으로
고려를 세운 왕건의 조상 가운데 호경이란 사람이 있었어. 그는 백두산 기슭에 살았는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어. 어느 날 호경은 한반도의 아름다운 땅을 두루 구경하고 싶어졌어. 그래서 백두산을 떠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지. 호경은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정착하려고 했어. 그런데 경기도 개성 땅에 이르러 부소산(지금의 송악산)에 오르니 경치가 마음에 들었지. 그리고 마을로 내려가 그 주위를 둘러보니 땅이 기름지고 자손대대로 복을 받을 만한 명당 자리였단다. 호경은 여기에 터를 잡아 살기로 하고 부소산 기슭에
초가집은 볏짚ㆍ갈대ㆍ밀짚 등을 재료로 지붕을 이어 지은 집이야. 초가집이라고 하면 대부분 볏짚으로 지붕을 얹은 집을 말하지. 초가집은 우리나라에서 집이 생길 때부터 있었던 민족 고유의 옛집이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서라벌에 부자들이 살아서 초가집이 한 채도 없다고 했어.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삼국 시대에 초가집이 일반 백성들이 널리 이용했던 살림집이었음을 알 수 있단다. 고려 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의 집은 초가집이었어. 큰 기와집에 돈 많은 양반들이 살았다면, 대부분의 가난한 백성들은 초
신라 제48대 경문왕은 이름이 김응렴이야. 열여덟 살에 화랑이 되었으며, 스무 살이 되자 헌안왕의 명령으로 전국을 돌아다녔단다. 화랑들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헌안왕은 화랑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어. 그 자리에서 헌안왕은 김응렴에게 물었지.“그대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보았는가?”김응렴이 대답했어.“저는 행실이 아름다운 세 사람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어 남의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부자이면서도 옷차림이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존귀하고 세력이 있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682년,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세웠어. 이 절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절이었어.문무왕은 살아 있을 때 늘 이런 말을 했어.“내가 죽으면 동해의 용이 되어 이 나라를 지키겠다. 그러니 동해에 장사를 지내게 해 다오.”아들 신문왕과 신하들은 이 유언을 받들어, 문무왕이 죽자 그를 동해에 장사 지냈어. 그의 시신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바다 입구의 대왕암이란 큰 바위에 뿌린 거지.그리고 감은사 법당의 계단 아래를 파서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어. 용이 된 문무왕이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때의 일이야.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바다와 육지를 통해 백제를 공격해 왔을 때, 의자왕은 사비성(부여)을 버리고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했어. 이때 의자왕을 모시던 3천 궁녀들은 슬피 울며 부소산 서쪽 끝 낭떠러지 바위로 몰려갔지.“적군에게 붙잡혀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 백마강에 떨어져 죽자!”궁녀들은 이렇게 결의하며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몸을 던졌단다. 이 바위는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하여 ‘타사암(墮死巖)’이라 불리었지. 그런데 이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꽃잎이 지는 것 같다고 해서 나중
마를 캐어 판 서동, 선화 공주와 결혼하다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는 어려서부터 얼굴이 예뻤어. 큰딸 덕만 공주(선덕 여왕)가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난 데 비해 선화 공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지. 그 무렵 백제 땅에는 ‘서동’이라는 총각이 살았어. ‘서동(薯童)’이란, ‘마를 캐어 파는 아이’라는 뜻이야. 서동은 마를 캐어다 팔아 생계를 꾸려 가고 있었어. 어느 날 서동은 선화 공주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 선화 공주를 아내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한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를 향해 떠났어. 신라에 도착한
황룡사는 삼국 시대에 가장 큰 절이야. 그 규모가 불국사의 여덟 배에 이르렀지. 진흥왕 14년(553년) 2월,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궁궐 동쪽에 새 궁궐을 건축하려고 터를 닦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 터에서 황룡이 나오는 거야. ‘아, 이곳은 궁궐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실 자리다.’이렇게 생각한 진흥왕은 그 터에 궁궐 대신 절을 짓기 시작했지. 이 공사는 무려 92년이나 걸렸어. 진흥왕 때 시작하여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선덕 여왕에 이르러서야 완성했거든.황룡사 법당 앞에는 높이가 80미터인 우리 민족 최고의 탑이 세워졌는데, 이
분 화장에는 쌀ㆍ보릿가루, 세수에는 녹두ㆍ콩ㆍ팥가루화장은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매만져 곱게 꾸미는 일이야. 인간은 왜 화장을 하게 되었을까? 다음의 세 가지 이유가 있단다.첫째는 ‘장식설’이야. 원시 사회의 생존 경쟁에서 이긴 투사의 몸에는 승리의 상처와 피가 남아 있지. 그것은 남들에게 감탄과 존경을 불러오고 용맹의 상징이 되어 뒷날 자연스럽게 장식으로 지도자들에게 전해졌다는 거야. 즉, 알몸에 문신과 그림을 새기는 것이 화장으로 발전했다는 거지.둘째는 ‘보호설’이야. 인간은 맹수나 다른 부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위장ㆍ은폐하
신라 제26대 진평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어. 맏딸은 신라의 첫 여왕이자 우리나라 첫 여왕이 되는 덕만 공주이고, 둘째 딸은 뒷날 임금이 되는 김춘추(태종 무열왕)를 낳은 천명 공주이며, 셋째 딸은 백제 제30대 무왕(서동)과 결혼하는 선화 공주야.그 가운데 맏딸 덕만 공주는 어려서부터 백성을 남달리 사랑하고 매우 지혜롭고 총명했어.어느 해 여름, 신라 서쪽 지방에서 물난리가 났어. 3만여 채의 집이 물에 잠겼으며, 2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었지. 집을 잃어 거리에 나앉은 수재민이 수만 명이었어. 이들은 당장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림
금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야. 외국 사람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문화재를 들라 하면 단연 첫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신라 금관이지.전 세계에 십여 점의 금관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여덟 점이 우리나라에 있어. 여섯 점이 신라 금관이고 두 점이 가야 금관이야. 신라 금관은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 국보 191호 황남대총 금관, 보물 338호 금령총 금관, 보물 339호 서봉총 금광, 그리고 교동 고분 금관 등이 있지.금관은 옛날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이야. 신라 금관은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옛 고구려 땅이었던 만주와 북한에는 고구려 고분이 1만 3천여 기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벽화가 있는 무덤으로 확인된 것은 106기라고 해. 4~7세기에 만들어진 이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연꽃이야. 연꽃은 무덤 벽을 가득 채우는가 하면, 벽이나 천장 등을 장식하는 데 쓰였지. 그렇다면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왜 연꽃이 많이 그려져 있을까? 그것을 설명하기 전에 고구려에서 전해지는 연꽃에 얽힌 이야기
미추왕과 귀에 댓잎 꽂은 병사들신라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대손이야. 박씨와 김씨가 이끌던 신라 왕실에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지. 제12대 첨해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신하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어. 미추왕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임금이었어. 당시에 백성들은 관청이나 귀족들에게 끌려 나가 부역을 하느라 모진 고통을 겪고 있었지. 미추왕은 이 사실을 알고 미추왕 11년(272년) 2월, 신하들에게 명령했어.“백성들을 사사로이 부역에 동원하지 말라. 농사일을 하느라 바쁜 백성들을 함부로 부려 먹어서야 되겠느냐? 농사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것을 ‘목간’이라고 해. 나무를 얇게 켜서 일정한 크기로 잘라 내 표면을 다듬은 뒤, 그 위에 붓으로 글을 적었지. 오랜 옛날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동물 가죽이나 비단, 토기, 천, 나무 등에 문자를 기록했어. 그런데 나무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에 매우 오랫동안 사용되었지. 처음에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죽간이 발명되었고, 그 뒤를 이어 나무로 만들어진 목간이 나왔단다. 목간은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 종이가 발명된 뒤에도 널리 쓰였지.소나무ㆍ밤나무ㆍ참나무 등으로 만들어
고구려 제2대 유리 명왕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이야. 주몽은 동부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졸본 땅으로 망명을 떠나기 전에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지.어느 날 어머니인 유화 부인이 주몽을 불러 말했어.“왕자들과 여러 신하들이 너를 해치려 하니 어서 이곳을 떠나거라. 네가 가진 재주와 지혜라면 장차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주몽은 동부여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어. 그들은 주몽의 재주가 워낙 뛰어나자 몹시 불안해하며 그를 없앨 궁리를 하고 있었지.주몽은 그날 밤 떠나기로 하고 세 청년을 집으로 불렀어. 오이,
유화 부인이 비둘기 목에 보리 종자를 걸어 아들 주몽에게 보냈다?보리는 추위에 약하다는 결점을 빼고는 아무 데서나 잘 자라고 재해에도 강해. 그래서 삼국 시대 이래로 쌀을 주식으로 삼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지. 따라서 보리는 쌀 다음으로 중요한 곡식이 되었단다.우리나라에서는 보리가 중국에서 전해졌어.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1세기경 주몽이 동부여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올 때 그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비둘기 목에 보리 종자를 걸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산상왕 25년(221년)과 신라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인도에서 시집올 때 차나무의 씨를 가져왔다?옛날 한반도 남쪽 땅에 가락국이 있었어. 이 나라를 세운 사람은 김수로였지. 그는 왕위에 오른 지 7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결혼하지 않아 왕비가 없었어. 신하들은 찾아와 마땅한 짝을 찾아주겠다고 했지만 수로왕은 자신의 짝은 하느님이 구해주신다며 거절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수로왕이 신하들을 불러 명했지.“유천간은 배와 말을 이끌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시오. 그리고 신귀간은 승점 고개에 가 있으시오.”망산도에 간 유천간은 바다를 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어. 바다
염료를 써서 옷감 등에 물을 들이는 것을 ‘염색’이라고 해. 자연에서 얻은 식물ㆍ동물ㆍ광물 염료를 이용하여 자연의 색상을 옷감에 옮기는 거지.식물 염료는 식물의 잎ㆍ꽃ㆍ줄기ㆍ열매ㆍ뿌리 등에서 얻은 것이고, 동물 염료는 동물의 피ㆍ즙ㆍ조개 분비물 등에서 얻은 것이야. 그리고 광물 염료는 황토ㆍ적토ㆍ흑토 등에서 얻은 것이지.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사용한 염료는 식물 염료야. 우리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에 염료를 채취해서 사용했지.염료로 쓰이는 식물은 50여 종에 이르는데, 색상별로 다양한 식물을 이용했어. 푸른 물을 들일 때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4, 5천 년 전에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벼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주로 재배하는 농작물이야. 그 열매의 껍질을 벗겨 낸 것을 쌀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 40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어. 벼는 밀ㆍ옥수수와 함께 세계 3대 식량 작물로 꼽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쌀을 주식으로 삼아 왔어. 벼농사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쯤에 중국 남부와 인도, 인도차이나 반도 등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중국을 거쳐 전해졌으며, 신석기 시대 후반부터
인간은 오랜 세월을 식물과 함께 살아왔다. 현재 지구상에는 30만여 종의 식물이 있는데, 그중 한반도에는 45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식물로 보는 한국사 이야기’는 한마디로 식물을 통해 본 우리 역사 이야기이다. 5000여 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한 여러 식물 얘기를 들려준다. 마늘과 쑥, 배추 등 우리 역사에 영향을 미친 식물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한국사가 한눈에 들어오고,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도 키울 수 있다. 단군 신화를 낳은 마늘과 쑥『삼국유사』에는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