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뜻을 같이합시다 
1392년에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어. 조선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고,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 그런데 사실 조선이란 나라를 계획하고 실천한 혁명가는 정도전이었어. 
정도전은 1342년에 충청도 단양에서 태어났어. 그의 본관은 봉화이며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야. 정도전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어. 아버지 정운경은 청백리였지만 큰 벼슬은 하지 못했고 집안은 가난했대. 머리가 좋았던 정도전은 성균관 시험에 붙어 정몽주와 더불어 이색에게 학문을 배웠어. 두 사람은 줄곧 함께 벼슬을 하였고, 성균관 박사로 학생들도 함께 가르쳤어. 게다가 정치적으로 같은 친명파였으니 절친한 친구요 동지였지. 
한 번은 원나라 사신이 왔는데, 친원파인 재상 이인임과 경복흥이 정도전에게 사신을 맞이하라는 명을 내렸거든. 정도전은 부리나케 경복흥의 집으로 달려가 소리쳤어.
“나에게 접대를 맡기면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가,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 버리겠소!”
경복흥은 불에 덴 듯 놀랐지. 
“네놈은 나랏일을 그르치는 반역자나 다름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경복흥이 눈에 불을 켜고 고함쳤지만 갓 벼슬길에 나온 정도전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어. 이 사건으로 인해 친명파 몇이 귀양을 가게 되었어. 이때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으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로 귀양을 갔거든. 그렇게 다른 방향으로 귀양을 간 뒤로 묘하게 두 사람은 점점 삶의 방향도 달라졌어.
그 이듬해 다시 벼슬에 돌아온 정몽주는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 큰 공을 세웠단 말이야. 그런데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나고도 복직은 되지 않았어. 
정도전은 고향으로 가서 공부에 전념했어. 정도전의 고향 단양에는 강원도 산골에서부터 내려온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거든. 넓은 강 가운데 작지만 우람한 섬 세 개가 봉우리를 우뚝 세우고 있어. 그 아름다운 세 섬이 도담 삼봉이야. 정도전은 그 이름을 따서 삼봉이라는 호를 사용했어. 
4년 뒤, 정도전은 한양으로 올라왔어. 삼각산 밑에 삼봉재라는 집을 짓고 후배들을 가르쳤지. 그런데 재상을 지낸 어떤 사람이 훼방을 놓는 바람에 거처를 부평으로 옮겨야 했어. 부평에서도 역시 그 지역 권세가가 방해를 해서 다시 김포로 갔어. 이렇게 정도전이 벼슬길로 나가지도 못하고 무시당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어.
첫째, 집안이 볼품없다는 것 때문이었어. 그의 아버지는 형부상서를 지낸 양반이었으나, 어머니는 노비의 핏줄로 알려져 있었거든. 외할머니가 어떤 재상 집안의 노비였다는 거야. 
사람들이 정도전을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야.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병법과 지리, 법률에도 밝았어. 성격도 호탕하고 배짱이 두둑하다 보니 잘난 척하는 걸로 비쳤을 수도 있어. 정도전은 절망하지 않고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어. 새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일에 대해 비밀스럽게 연구했어. 그 준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1383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어. 자신과 뜻을 같이할 사람을 찾아 나선 거야. 이때 백성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사람은 정몽주, 최영, 이성계 셋이었어. 정몽주는 학문과 덕이 높았고, 최영과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를 무찔러 인기가 높았거든. 그 가운데 정도전은 막강한 군사를 가진 이성계의 군영으로 찾아갔어. 
“참으로 훌륭한 군사들입니다. 이 군대만 가진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사를 보고는 몹시 감탄했어. 이 정도 군사력이면 충분히 새 나라를 열겠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정도전은 이성계의 진영 가운데 우뚝 선 큰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내고 소나무 몸통에 시 한 수를 적었어.

오랜 세월 버티어 온 한 그루 소나무여/ 청산에 태어나 자라 몇만 겹인가/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그동안은 우리가 만나지 못해 세상에 묵은 흔적만 있으니, 이제 함께 새 세상을 만드는 게 어떠냐는 의미야. 시를 본 이성계는 정도전의 두 손을 굳게 잡았어. 
“옳은 말씀이오. 좋은 때에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뜻을 같이합시다.”
이성계는 장수로서 덕망이 높고 지도력도 뛰어났어. 부하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랐지. 그러나 젊어서부터 전쟁터만 누비고 다닌 탓에 학문이 깊지 못했어. 이런 터에 정도전같이 뛰어난 학자가 찾아오니 무척 반가웠던 거야.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계는 새 나라를 세울 꿈보다는 고려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을 거야.

재상의 나라를 꿈꾸다
정도전은 한동안 이성계를 따라다니며 참모 노릇을 했어. 그러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다시 벼슬을 받아 조정으로 돌아왔지. 정도전이 고려 조정의 핵심으로 떠오른 건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부터야. 이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의 머리가 되었어. 새 나라에 대한 계획은 대부분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거든. 공양왕을 세워 우왕과 창왕을 처리하게 한 것도 그의 계략이었어.
1392년 마침내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은 개국 일등 공신이 되었어. 그는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여러 벼슬을 한꺼번에 받아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 그만큼 이성계가 정도전의 실력을 인정하고 믿었던 거야. 정도전은 자신이 연구했던 새 나라의 청사진을 실천해 나가기 시작했어. 그는 먼저 조선의 새 도읍지를 한양(서울)으로 정했어. 이성계는 대전으로 하고 싶어 했으나 정도전은 한양을 강하게 권했지. 정도전은 궁궐의 위치를 정하고 성문의 이름까지 직접 지었어. 경복궁, 창덕궁, 숭례문 등 지금 서울의 궁궐과 성문 이름은 대부분 정도전이 지었어.

 

그는 또 조선의 법령을 만들었어. <<조선경국전>>이란 법전을 펴내서 조선의 정치, 군사, 행정, 경제에 대한 원칙을 법으로 정했어. 정도전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고려국사>>를 펴내 역사를 정리하고, 병법서를 펴내 군사 훈련까지 시켰어. 여러 방면에 뛰어났기에 이 엄청난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인 정도전은 조선 건국 후에 종종 이런 말을 했어.
“한나라 고조 유방이 장량의 도움에 힘입어 한나라를 세웠지만, 한편으로는 장량이 고조를 이용하여 한나라를 세운 것이다.”
자신 역시 이성계를 이용해 조선을 세웠다는 말이었지. 이런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정도전이 꿈꾸는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정도전이 꿈꾸는 나라는 왕 중심이 아닌 신하 중심이었어. 왕은 덕을 잃지 않은 채 하늘만 잘 섬기면 된다고 보았어. 실질적인 국가 경영은 조정 대신들의 몫이고, 그 수장은 재상이라고 했지. <<조선경국전>>의 ‘재상 연표’는 이러한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단다. 

총재(재상)는 여러 직책을 겸임하지만 인주(왕)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택하는 것뿐이며, 그 밖의 모든 정사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것이 정도전이 꿈꾸던 나라였어. 임금은 뛰어난 재상 한 명만 잘 뽑고, 만일 나랏일이 잘되지 않으면 재상 한 명만 바꾸면 된다는 거야. 그러면 그 재상이 자기 이상에 맞는 인재들로 다시 조정을 구성하는 거지. 이는 총리가 나랏일을 이끄는 오늘날의 내각 책임제와 비슷하니 정말 혁명적인 제도였지. 정도전은 종종 이런 말도 했어.
“나라는 모든 백성을 위해야지, 어느 한 집안(왕실)을 위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힘을 고루 나누어 가져야 한다. 임금은 한 집안에서 대를 잇는데, 언제나 지혜롭고 어진 사람이 임금이 된다는 보장이 없다. 만일 포악한 사람이 임금이 되면 독재를 할 것이고, 그 고통은 모든 백성이 당하게 된다. 신하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므로, 슬기롭고 청렴한 자를 뽑아 쓰면 된다. 따라서 임금이 신하들과 힘을 나누어 가져야 나라가 오래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정도전의 사상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었어. 그는 왕권의 확립과 강화만이 나라의 안정을 가져온다고 믿었어. 신하가 힘이 세면 언제든지 왕을 몰아내고 나라를 가로챌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지. 그는 학문에서는 정도전의 제자였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은 정반대였어. 그러니 두 사람의 한판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지.

/자료 제공= ‘빛난다! 한국사 인물 100-⑥ 고려 후기: 어두운 시대에 등불을 밝히다’(박윤규 글ㆍ이경석 그림ㆍ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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