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소년, 왕의 스승이 되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고려는 치욕스런 시절을 보냈어. 고려의 왕이 될 세자는 볼모로 원나라에 가야 했지. 그러다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한 다음 왕으로 책봉되어 고려로 돌아오는 거야. 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부터 고려 왕들은 이름에 반드시 ‘충’ 자를 붙여야 했어. 원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뜻이었지.
이제현은 그런 시대인 1287년에 태어났어. 나라 사정이 어려운 데 비해 이제현의 가정 환경은 아주 좋은 편이었어. 그의 조상은 고려의 개국 공신이었고, 아버지 이진은 재상급 벼슬인 검교시중이었거든. 이진은 학문이 깊고 글을 잘 지었어. 이제현도 글을 짓는 데 뛰어나 일찌감치 이름을 드날렸어. 겨우 열다섯 살에 소과인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할 정도였지. 
이때 과거를 책임진 관리는 권보였어. 학문이 깊은 권보는 이제현의 재주를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어.이제현은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했어. 곧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지. 벼슬 운도 좋았어. 스물두 살에 예문춘추관에 뽑히고, 지방 수령도 지냈어. 그러면서도 학문 탐구를 멈추지 않았지. 어느덧 그의 학문이 고려에서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가 되었거든. 
어느 날 충선왕이 이제현을 불렀어. 원나라에서 돌아와 충렬왕의 뒤를 이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지. 그는 원나라에 살 때부터 학문에 관심이 깊었는데, 이제현의 학문을 시험하고 싶었던 거야.
“태조 때에 거란이 낙타 수십 마리를 보내지 않았는가?”
충선왕은 고려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이야기를 꺼냈어. 
“예. 거란이 우리 고려와 국교 맺기를 청하며 낙타를 가져 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낙타들을 만부교 다리 밑에서 굶겨 죽였다고 들었네.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으면 그뿐이지, 굳이 낙타를 애처롭게 죽게 할 필요가 있었는가?”
이는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야. 자칫하면 고려 태조 왕건의 외교 정책을 비판할 수도 있거든. 게다가 원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충선왕은 우리 역사를 잘 몰랐어. 그런 충선왕의 약점을 꼬집었다가는 왕의 미움을 살 수도 있는 상황이야. 이제현은 소신껏 설명했어.
“우리 태조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랑캐들의 간악한 잔꾀를 꺾어 버리려 한 것이며, 후세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깊이 헤아리시고 힘써 행하여 본받도록 하시옵소서.” 
충선왕은 이제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어.
다른 날 충선왕이 다시 이제현을 불러 질문을 던졌어.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중국과 문화가 대등하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요즘 선비들은 승려에게 글을 배우는가?”
원나라 문화에 젖은 충선왕은 고려의 학문이 높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던 거야. 이제현은 차근차근 충선왕의 의문을 풀어 주었어.
“태조께서는 교육을 장려하여 인재를 길렀습니다. 광종 이후에는 중앙에는 국학을,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동네마다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니 우리 문화가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승려에게 공부를 배우게 된 까닭은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탓입니다. 무신들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문신을 마구잡이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학문이 높은 많은 인재들이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때문에 젊은이들이 학문이 높은 승려를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무신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임금이 바로 서고 나라의 질서가 다시 잡혀 가는 중입니다. 이때 학교를 세워 교육을 장려한다면 승려에게 학문을 배우는 일은 차츰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현의 설명을 들은 충선왕은 크게 기뻐하며 노비와 토지를 상으로 내렸어. 그 후 충선왕은 이제현을 스승으로 삼았단다.

 

홀로 원나라와 싸워 이기다
이제현은 당대에 가장 뛰어난 학자요 시인이었어. 하지만 그는 예술과 학문에만 몰두하지 않았어. 고려의 대신으로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뜨거웠어. 1323년, 고려는 나라 이름조차 사라질 뻔한 위기를 맞았어. 원나라의 새로운 황제가 고려를 아예 원나라의 한 지방으로 만들려고 한 거야. 이를 입성책동이라고 해. 충선왕이 그걸 반대하자 원나라 황제는 그를 먼 티베트 지방으로 귀양 보내 버렸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향에 돌아와 있던 이제현은 그 소식을 듣고는 원나라로 달려갔어. 그는 원나라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어.

 …… 우리 고려는 태조가 나라를 연 지 어느덧 40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맡은 일을 성실하게 완수하였고, 귀국(원나라)을 위해 세운 공로도 적지 않습니다. 요나라(거란족)가 침략했을 때 귀국은 두 장군을 시켜 토벌하게 하였지만,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길이 끊어져 무기와 식량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 충헌왕이 조충과 김취려를 시켜 식량과 무기를 건네주었고, 싸움에 미쳐 날뛰던 적들을 대나무를 쪼개듯 무찔렀습니다. 그러자 귀국의 두 장수는 우리 장수들과 의형제를 맺고 영원히 변치 말기를 맹세했습니다. ……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를 없애고 행성을 세워 한 개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만든다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스스로 황제의 말을 어기는 셈입니다. 몇 년 전에 세조 황제께서 옳지 못한 것과 옳은 것에 대해 각각 그에 맞는 방도로 대처하여 세상을 안정시키겠노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 

이 글을 읽은 원나라의 황제와 신하들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어. 당당하고 힘찬 문장도 빼어났지만, 역사적인 증거를 들며 이치에 꼭 맞는 말을 하니 반박할 꼬투리조차 없거든. 이 상소문으로 고려를 없애자는 입성책동은 쏙 들어가고 말았지. 고려의 임금과 신하가 끙끙대며 걱정할 때, 이제현이 홀로 붓을 들어 원나라와 싸워 이긴 거야.
이제현의 활약은 충혜왕 때에도 이어졌어. 1339년, 충혜왕은 자신이 임금이 되는 데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을 모조리 처형했거든. 그 가운데는 원나라 황실과 친한 사람이 많았어. 이를 안 원나라에서는 충혜왕을 연경으로 데려가 가두어 버렸어.
이제현은 이번에도 홀로 연경으로 달려갔어. 그리하여 상소를 하고 담판을 벌인 끝에 결국 충혜왕을 구해 돌아왔어. 모두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외교 능력 덕분이었지.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무려 여섯 임금을 섬기며 나라를 위해 일했어. 과거 책임자인 지공거가 되어 이곡, 이색 같은 인재를 뽑기도 했지. 그들이 주자학(성리학)의 전통을 잇게 한 것도 중요한 업적이야.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던 이제현은 <<익재난고>>와 같은 문집을 남겼어.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역사책을 편찬하다가 숨을 거두었어. 이제현의 묘비에 제자 이색은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새겼어. 훗날 조선의 재상 유성룡도 ‘고려 500년을 통틀어 이제현 만한 인물은 없다’고 높이 평가했단다.

/자료 제공= ‘빛난다! 한국사 인물 100-⑥ 고려 후기: 어두운 시대에 등불을 밝히다’(박윤규 글ㆍ이경석 그림ㆍ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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