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의 심장,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그 이듬해인 1909년 초, 안중근은 동지 11명을 모아 놓고 말했어.
“우리는 지금까지 독립을 위해 애썼으나 딱히 이룬 게 없소. 보다 강력한 결심과 조직이 필요한 시점이오. 우리 다 같이 손가락을 끊어 증거를 보인 다음,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기로 맹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장한 안중근의 말에 모두 찬성했어.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은 저마다 왼손 약지 한 마디씩을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네 글자를 썼어. 이를 단지 동맹이라고 해.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친일파 대신들을 처단하기로 뜻을 모았어. 맹세를 한 열두 동지는 함께 만세를 부르고는 각자 일할 곳으로 흩어졌지. 
이후 새로운 독립운동을 궁리하던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 거기서 <대동공보>라는 신문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하러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 
‘드디어 소원을 이루겠구나. 늙은 도둑을 내 손으로 끝장내게 되다니!’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어. <대동공보> 사장 최재형이 자금을 대고, 이강은 정보를 제공하고 하얼빈의 동지도 소개해 주었지. 하얼빈에서 조도선과 유동하가 합류했어. 유동하는 통역을 맡았는데, 고작 18세 소년이었어.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할 날이 다가왔어. 안중근과 동지들은 만일을 위해 두 조로 나누었어.
“드디어 내일이오. 이토는 이곳 채가구(차이자거우)역을 지나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오. 우 동지와 조 동지는 여기 여관에서 기다리다가 기회를 보아 이토를 처단하시오. 실패하면 내가 하얼빈에서 처단하겠소.”
안중근과 동지들은 뜨겁게 포옹을 하고 영원한 이별이 될지 모르는 악수를 나누었어. 그리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떠났지.
1909년 10월 26일 아침이 밝았어.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한 건 오전 9시야. 열차가 제시간에 도착했다는 건 차이자거우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뜻이었지. 실은 차이자거우역의 러시아 경비병이 우덕순과 조도선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고 그들이 묵은 여관의 문을 잠가 버렸던 거야.
하얼빈역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일본인들이 가득했어. 역 구내엔 러시아 의장대와 경비병이 쫙 깔려 있었지. 안중근은 권총을 품에 숨기고 일본인들 틈에 끼여 있었어. 
9시경,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 열차가 도착했어. 
‘그런데 어떤 자가 이토인가?’
안중근은 문득 당황했어. 지금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본 적도 없고 사진도 없었거든. 하지만 안중근은 대범하게 일본과 러시아의 고관들 앞으로 걸어 나갔어. 번쩍이는 그의 눈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이 수북한 조그만 늙은이가 쏙 들어왔어. 그가 이토 히로부미라는 확신이 든 안중근은 품속의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어.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이 울렸고, 비명이 플랫폼을 뒤덮었지. 안중근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토 히로부미를 확인하고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어.
“탕! 탕! 탕!”
혹 쓰러진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옆의 일본 고관들을 또 쏜 거야.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목적을 이루었다고 판단한 안중근은 만세를 세 번 외쳤어. 러시아 경비병이 달려들자 반항하지 않고 체포되었지.

 

총알을 세 발이나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수행원들이 급히 열차 안으로 옮겨 치료했으나 곧 숨을 거두고 말았어. 안중근의 거사는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어. 안중근은 죄를 묻는 검찰관에게 당당하게 대답했어.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건 대한 독립 전쟁의 일부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 일이다. 그러니 나를 전쟁 포로로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동양 평화를 위해 애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이토의 죄를 줄줄이 읊어 주었어. 
“이토의 죄는 열다섯 가지다. 대한 제국의 황후 폐하를 시해한 죄, 대한 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요청했다고 거짓으로 알린 죄, 군대를 해산한 죄…….”
안중근은 이처럼 당당하게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와 정당성을 주장했지. 그 후 뤼순 감옥으로 옮겨져 여러 차례 심문과 재판을 받았어.
재판은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1910년 2월 14일 결국 일본 정부가 짜 놓은 대로 판결이 내려졌어.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에 처한다!”
그 후 안중근은 항소도 하지 않고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찬찬히 글을 지었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담은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먼저 쓰고 <<동양평화론>>을 써 나갔지. 이런 안중근의 태도는 감옥의 소장과 간수들까지 감동시켰어. 뤼순 감옥 소장은 자신의 자손들에게까지 안중근을 존경하라고 가르쳤대.
사형 선고를 한 지 40여 일이 지난 3월 26일, 일제는 서둘러 안중근의 사형을 집행했어.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지어 준 수의를 입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지. 일제는 안중근의 시체도 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어디엔가 감춰 버려 오늘날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단다.
다음 글은 사형 직전에 면회를 온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에게 남긴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이야.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다오. 나는 천국에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자 나라를 위해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자료 제공= ‘빛난다! 한국사 인물 100-⑩ 일제 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라!’(박윤규 글ㆍ최미란 그림ㆍ시공주니어)

 

저작권자 © 소년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

Tags #안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