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 건너가 도자기의 신이 되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국 일본을 통일하고 1592년, 조선을 침략했어. 임진왜란이 시작된 거야. 일본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군사들과 조총의 위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평양까지 점령했어. 그러나 조선 수군과 의병이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기 시작하고 명나라의 구원병까지 힘을 보태자, 일본군은 더는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지. 이후 일본은 명나라와 강화 협상을 벌였지만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했어. 이 사건을 정유재란이라고 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번에는 보통의 전투부대 이외에 여섯 개의 특수부대를 파견했어. 그중 포로부는 조선의 일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았고, 도서부는 책, 금속부는 금속 예술품이나 금속활자, 보물부는 금은보화나 귀중품, 축부는 가축을 포획했지.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공예부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런 명령을 내렸어. 
“조선인이 쓰던 도자기라면 무엇이든 좋다. 개밥그릇이든 요강이든 모조리 가져와라!”
그뿐이 아니야. 이참에 오랫동안 꿈꿔 온 목표, 즉 자기의 직접 생산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지.
“조선인 포로 중에서 세공을 하는 자, 손재주가 있는 자는 모두 데려오라!” 
공예부의 임무에는 도자기뿐 아니라 도공을 포로로 잡아 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어. 정유재란이 한창일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7년간의 전쟁이 모두 끝났어. 그런데 퇴각하는 일본군의 배에는 특수부대가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와 수많은 물자가 실려 있었어. 그중에는 도공들도 포함되어 있었지. 일본군 장수들은 철수하는 과정에서 경쟁하듯 조선 도공들을 끌고 왔어. 그중에 ‘이삼평’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당시 이삼평의 나이는 스무 살. 나베시마는 그에게 자기 제작을 명령했어. 당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은 도기 제작 수준에 머물러 있었어. 자기를 생산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지? 1200도 이상의 온도와 고령토야. 
이삼평이 보기에 온도를 높이는 건 가능한데 문제는 흙이었어. 이삼평은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고령토를 찾아 20년 가까이 떠돌았고, 규슈의 아리타에 있는 한 광산에서 원하던 흙을 드디어 찾아냈어. 어느덧 서른여덟 살이 된 이삼평은 이 흙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자기 생산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어. 
이후 다른 지역에서 살던 조선 도공들도 아리타로 왔어. 아리타에 조선 도공 900여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겨났고, 가마도 40개가 넘게 만들어졌지. 
1655년 이삼평이 세상을 떠나자, 일본인들은 그를 기념하는 장소를 만들었어. 오른쪽 사진을 봐. ‘도조이삼평비’라고 새겨져 있어. ‘도조’는 ‘도자기의 시조’라는 뜻이야.

일본인들이 일본 최초로 자기를 제작한 이삼평을 기려서 이 기념비를 세웠지. 그뿐이 아니야. 일본은 800만 신을 섬기는 신토의 나라라고 했지? ‘도조’ 이삼평을 신으로 섬겼고, 그를 위한 신사도 만들었어. ‘도잔신사(陶山神社)’라고 하지. 이제 앞에서 본 도리이가 어느 신사의 정문인지, 도리이를 도자기로 만든 까닭이 무엇인지 알게 됐을 거야.

원조를 뛰어넘은 모방품
일본 자기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어. 그중에서도 최고는 이삼평의 자기였지. 만든 지역 이름을 따서 ‘아리타 자기’라고 불렸어. 이 자기에는 ‘이마리 자기’라는 별칭도 있었어. 아리
타 자기가 ‘이마리’라는 이름의 항구를 통해 해외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주로 ‘이마리 자기’라고 불렀지. 일본 자기가 외국으로 수출된 건 자기 생산에 성공한 지 3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야.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자기 생산이 600년 정도 늦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세계는 대항해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이 바다를 통해 중국과 일본으로 왔고, 뒤이어 네덜란드도 이 대열에 합류했어. 그런데 일본이 쇄국정책을 펴면서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의 입국을 모두 막은 거야. 
당시 네덜란드는 중국 자기를 다량으로 수입해 유럽 시장에서 경매로 큰돈을 벌고 있었어. 그런데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사이에 수십 년 동안 전쟁이 벌어졌어. 네덜란드의 자기 수입에 적신호가 켜진 거야. 그런데 그때 마침 일본이 자기 생산에 성공했어. 네덜란드는 일본 자기를 수입하기로 했어. 대신 중국풍 자기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고, 일본도 여기에 호응했지. 처음에는 중국 자기를 모방했지만, 점차 독자적인 자기를 만들어 수출했고,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지. 
당시 중국은 청화백자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었지만, 일본은 아리타를 중심으로 채색자기를 개발했어. 특히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킨란테’, 금채로 무늬를 새긴 도자기야. 일본의 풍경이나 일본적인 풍속을 보여 주는 호화로운 장식을 좋아하는 유럽 귀족들의 취향과 잘 맞았다는구나.

1659~1682년에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가 20만 점 가까이나 된다고 해. 네덜란드 상인은 일본 자기를 유럽에 팔 때 처음에는 중국산이라고 속였지만, 점차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어.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이 이 이마리 자기를 모방하여 수출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 그런 자기를 ‘차이니즈 이마리’라고 해. 일본은 오랫동안 자기의 직접 생산에 목말라 있었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도공들을 포로로 잡아 가 자기 생산에 성공함으로써 그 갈증을 풀 수 있었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펼쳤지만, 일본은 네덜란드라는 창을 열어 두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는 달랐어. 일본은 자기 생산이 우리나라보다 600~700년 늦었지만, 자기로 세계와 소통한 덕분에 명성에서는 더 앞섰던 거야. 

/자료 제공=‘세계사를 담은 도자기 이야기’(강창훈 지음ㆍ웃는돌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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