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활동이 어려워진 방정환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 도요 대학 철학과에 특별 청강생으로 다니며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지. 그동안 많은 선각자들이 젊은이를 교육시키는 데 집중했는데, 방정환은 청년보다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한 거야. 
“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이다. 또 가장 맑고 깨끗한 하느님의 본성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 그 아름다운 본성을 더럽히지 않고 잘 키우는 것이 세상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방정환은 그 방법을 먼저 문학에서 찾고자 했어. 그는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라는 시를 지어서 천도교에서 펴내는 잡지 <<개벽>>에 발표했어. 이때 공식적으로 처음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했단다. 그 전까지는 아이들을 낮게 취급해서 ‘아이, 애놈, 애새끼’ 등으로 불렀거든. 
방정환은 이 무렵부터 소파(小波)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소파란 ‘작은 물결’이란 뜻이야. 잔잔한 물결처럼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겠다는 뜻이라고 해.
조국의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까 고민하던 방정환은 서점에서 다음 할 일을 찾았어. 일본에는 그때 이미 서양의 동화들을 번역해서 내놓은 책이 많았어. 방정환은 그 책들을 읽고 감동적인 작품 10편을 골라 번역해서 읽기 쉽도록 꾸몄어. 어린이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으로 책 제목을 <<사랑의 선물>>이라고 붙였지. 
그 원고를 들고 귀국한 방정환은 1922년에 개벽사에서 <<사랑의 선물>>을 펴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동화책이야. 그 책에는 <산드룡의 유리 구두(신데렐라)>와 같은 서양의 유명 동화들이 실려 있었어.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야기들이었지. 

 

이때 방정환이 급히 돌아온 또 다른 이유는 장인 손병희의 죽음 때문이었어. 3ㆍ 1 운동 대표로 감옥살이를 하던 손병희는 병이 깊어 풀려났는데, 회복을 못 하고 숨을 거둔 거야. 
장인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방정환은 다음 계획을 짰어. 유학생 가운데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말했어.
“교육이란 100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미래의 희망인 우리 어린 새싹들을 잘 키우기 위한 모임을 만들고 싶은데 어떤가?”
대부분 문학, 교육, 철학, 예술을 공부하던 친구들이라 좋다고 했어.
“그렇다면 모임 이름이 있어야 할 텐데. 어린이와 잘 어울리는 걸로 말이야.”
방정환의 말에 음악을 공부하는 윤극영이 제안했어.
“색동회가 어떤가? 아이가 태어나면 백일, 돌잔치 등을 거치는데, 이때 색동저고리를 입지 않나.” 
방정환이 손뼉을 치면서 찬성하자 모두들 따라서 손뼉을 쳤어. 이렇게 해서 색동회가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어린이 문화 운동을 이끌고 있단다. 이름을 제안한 윤극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인 <반달>과 <고드름>, <따오기> 같은 노래를 지었어. 뒤늦게 참여한 윤석중도 많은 동화와 동요를 지어 색동회의 활동을 크게 빛냈지.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대체로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많은 노동에 시달리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지 않는가. 외국에서는 메이데이(5월 1일)를 정해서 노동자들을 쉬게 하고 격려한다는데, 우리 어린이들한테도 그런 날을 만들어 주면 어떻겠는가?”
방정환의 이런 제의에 색동회 회원들은 기꺼이 찬성했어. 이렇게 하여 어린이날이 탄생하게 된 거야. 고국으로 돌아온 방정환은 첫 번째 어린이날 행사를 1923년 5월 1일에 하기로 했어. 천도교 교당에 어린이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어 줄 생각이었지. 그날의 감격을 방정환은 <사월 그믐날 밤>이란 동화에 아주 아름답게 표현해 놓았어.

사람들이 모두 잠자는 밤중이었습니다. 절간에서 밤에 치는 종소리도 그친 지 오래된 깊은 밤이었습니다. 깊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밖에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한 밤중이었습니다.
이렇게 밤이 깊은 때 잠자지 않고 마당에 나서 있기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참말 내가 알기에는 나 하나밖에 자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음 어린이날이 생기는 설렘과 기대에 잠을 설치는 지은이의 마음이 느껴지지? 사실 청년들을 교육시켜 독립군으로 만들어야지 무슨 어린 애들이랑 독립운동을 하느냐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훨씬 많았거든. 그런 한밤중 같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만 별처럼 눈을 뜨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혼자 새날을 준비하는데, 이 동화에서는 꽃과 새와 나비들이 함께 준비를 해. 동화의 마지막 문장을 보렴.

오월 초하루는 참말 새 세상이 열리는 첫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어린이날은 처음에 5월 1일로 했다가, 5월 첫째 일요일로 바뀌었고, 해방 후에는 5월 5일로 확정했단다. 그리고 1954년에는 유엔에서 11월 20일을 세계 어린이날로 정했어. 그리고 나라마다 날짜는 다르지만 차차 어린이날을 기념하고 잔칫날로 삼게 되었으니 새 세상이 열린 게 맞지.
방정환은 어린이날 행사를 위해 포스터를 만들고,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어린 동무들에게’라는 글도 만들어 나누어 주었어. 그리고 그날이 되면 준비한 음악회, 연극, 동화 구연, 운동회 등 풍성한 행사를 하고는 기념품을 주곤 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문예 잡지 <<어린이>>를 만든 거였어. 그 창간사를 보면 어린이에 대한 방정환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나.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두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그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그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노는 모양 그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그대로가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어른의 욕심도 있지 아니하고 욕심스런 계획도 있지 아니합니다. 죄 없고 허물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 나라! 그것은 우리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1923년에 만든 <<어린이>>는 처음엔 얼마 찍지 못했는데, 곧 엄청난 인기가 생겨 10만 부씩 찍게 되었어. 당시 가장 많이 찍는 신문도 5만 부 정도였는데, 월간지가 10만 부라니! 
오늘날에도 그런 잡지는 찾기 힘들어. 당시에 아이들 볼거리가 없는 참에 불티나게 팔린 거지. 이 잡지를 통해서 마해송이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발표하고, 이원수도 동요 <고향의 봄>을 발표해 많은 인기를 끌었어. 방정환도 <<어린이>>에 많은 동화와 이야기를 발표했어. <만년샤쓰>라는 동화도 발표하고, 동시와 동요도 실었지. 장편 동화 <칠칠단의 비밀>은 인기가 높아 훗날 만화 영화로 만들기까지 했어.
방정환은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가장 잘하는 일은 동화 구연이었어. 방정환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대부분 감동하여 눈물바다를 이루곤 했어. 심지어 감옥살이를 할 때는 감옥의 죄수들과 간수들까지 이야기에 푹 빠져 지냈고, 감시자로 따라다니던 일본 경찰조차 이야기를 듣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대. 
글 쓰고, 여러 가지 잡지 만들고, 동화 구연하고, 다양한 행사를 치르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던 방정환은 33세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자료 제공= ‘빛난다! 한국사 인물 100-⑩ 일제 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라!’(박윤규 글ㆍ최미란 그림ㆍ시공주니어)<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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