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가을, 폴란드의 젊은 음악가 쇼팽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연주를 하러 떠났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고전주의 음악을 꽃피운 도시에서 자신의 음악을 다시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쇼팽이 빈을 찾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섬세하고 미묘한 연주를 펼쳤던 청년 음악가가 다시 빈을 찾아오자 사람들은 누구보다 뜨겁게 그를 맞이했다. 
쇼팽의 빈 생활은 행복했다. 쇼팽과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연주회가 줄이었고, 같은 폴란드 출신으로 늘 함께 어울리던 친구 티투스도 빈에 머물고 있어 의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럽을 휩쓸던 혁명의 물결을 타고 조국 폴란드에서도 무장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독일), 오스트리아에 의해 셋으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군대를 보내려 하자 폴란드인들은 왜 전쟁에 총알받이로 내보내느냐며 분노를 터뜨렸다. 쇼팽과 티투스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혁명이 성공한다면, 드디어 폴란드도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당당한 독립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씩씩하고 건장했던 티투스는 곧바로 짐을 꾸렸다. 폴란드로 돌아가 혁명군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였다. 쇼팽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쇼팽이 함께 가겠다고 나서자, 티투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싸움터가 아니야. 음악가는 음악으로 조국에 봉사해야지. 모두가 그걸 바랄 거야.”
쇼팽은 연주를 계속하며 빈에 머물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오스트리아의 인심도 사나워졌다. 쇼팽처럼 오스트리아에 사는 폴란드 사람들은 궁지에 몰렸다. 쇼팽의 음악도 설 자리가 좁아졌다. 흥겨운 왈츠와 무도회가 유행하면서 쇼팽이 작곡한 곡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마침내 1831년 7월, 쇼팽은 빈을 떠났다. 프랑스 혁명 후 유럽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파리로 갈 작정이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 각국의 예술가들과 정치 망명객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게다가 쇼팽의 아버지도 프랑스인이라서 그는 파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쇼팽은 독일에서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지만, 곧 조국의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쇼팽은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신이시여,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어머니, 아버지는 무사하실까? 누이들은? 전쟁터에 있는 티투스는…. 나는 정말이지 아무 쓸모도 없는 놈이다….’
쇼팽은 끝없는 무력감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일기에 비통한 마음을 쏟아부었다.
‘티투스를 따라 돌아갔어야 했는데. 아니, 처음부터 조국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피아노 뚜껑 위에는 먼지가 앉았고, 젊은 음악가의 마음은 깊고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미칠 듯한 불안과 고독 속에서 그는 생명의 끈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쇼팽은 두 달 전 조국에서 온 마지막 편지를 꺼냈다. 친구이자 시인인 비트비키가 쓴 구절들이 가슴에 하나하나 박혔다. 
‘이곳의 우리는 모두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조국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금, 폴란드인이라면 누구도 냉정하게 있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랑하는 벗이여, 그대는 번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대의 예술로 그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그리하여 그대의 가족과 조국의 위안이 되고 영광이 되기 위해 멀리 떠났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기 바랍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힘없는 조국과 자신의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자신이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쇼팽은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에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실었다. 격렬한 소리의 물결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외롭고 두려웠던 청년 음악가의 영혼이 울부짖었다.

쇼팽의 마지막 피아노 : 쇼팽이 1848년부터 1849년 사망할 때까지 사용한 피아노. 프랑스의 유명 피아노 제작자이자 쇼팽의 후원자였던 플레이엘이 만들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쇼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쇼팽의 마지막 피아노 : 쇼팽이 1848년부터 1849년 사망할 때까지 사용한 피아노. 프랑스의 유명 피아노 제작자이자 쇼팽의 후원자였던 플레이엘이 만들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쇼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연습곡 제12번. ‘알레그로 콘 푸오코(불같이 빠르게)’라는 연주 지시어가 붙은 이 곡은 쇼팽이 절망과 슬픔을 헤치고 쓴 곡으로, 훗날 <<혁명 연습곡>>으로 불리게 된 곡이다. 
쇼팽은 스물일곱 곡의 연습곡을 작곡했는데, 피아노 연주법을 훈련하기 위한 연습곡(에튀드)은 손가락과 손목을 쓰는 다양한 기교를 소개하고 있어 연주하기가 까다롭다. 쇼팽의 연습곡은 기술적인 요소뿐 아니라 풍부한 시정과 예술성까지 갖추고 있어 단순한 훈련용 연습곡을 뛰어넘은 피아노 음악의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그 뒤 쇼팽은 돌아갈 수 없는 조국 폴란드를 가슴에 간직하고 죽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그리고 조국의 슬픈 운명을 생각하며 폴란드 춤곡인 폴로네즈와 마주르카를 비롯한 수많은 곡들을 써 내려갔다. 폴로네즈와 마주르카는 폴란드의 전통 춤곡으로, 박자가 뚜렷하며 선율이 단순하다. 폴로네즈는 궁정에서 기사들이 추는 춤에서 유래하여 씩씩하고 영웅적이며, 마주르카는 폴란드 농민들의 춤으로 자유롭고 민속적이다. 쇼팽이 쓴 80여 곡의 폴로네즈와 마주르카는 형식은 단순하지만 쇼팽 특유의 세련된 선율을 정교하게 엮은 구성에 화성과 조성, 리듬을 다양하게 바꾸어 가며 폴란드의 화려한 색채를 더했다. 폴란드의 색채가 아로새겨진 이 서정적인 곡들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1849년, 쇼팽은 서른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파리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심장만은 유언대로 고향에 묻혔다. 쇼팽이 스무 살 이래로 한 번도 밟지 못한 땅, 자신의 영혼을 두고 온 그리운 조국 폴란드에.


피아노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작곡가
일곱 살 때 첫 폴로네즈를 작곡하고, 여덟 살 때 자선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천재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1810~1849)은 평생에 걸쳐 수많은 피아노곡을 남겼다. 쇼팽이 작곡한 곡은 대부분 피아노곡이었다. 그것도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작품이 아닌 전주곡(프렐류드. 도입부 역할을 하는 곡), 야상곡(녹턴. 밤을 생각나게 하거나 밤에 영감을 받아 만든 음악), 즉흥곡(즉석에서 작곡한 듯한 자유로운 느낌의 곡)과 같은 소품들이었다. 하지만 쇼팽의 피아노곡에는 섬세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쇼팽은 음과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거나 연주자가 자유롭게 박자를 바꾸며 연주하는 기법, 까다로우면서도 기발한 리듬 등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피아노곡들을 작곡해 냈다. 이러한 매력 덕분에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며, 피아노를 사랑하는 수많은 음악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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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외젠 들라크루아의 <<쇼팽과 상드>>
쇼팽은 프랑스의 작가 조르주 상드와 10년간 연인 사이로 지냈다.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상드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쇼팽이 음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어머니처럼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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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쇼팽의 연주회>>, 헨리크 시에미라츠키, 1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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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코르넬리 슐레겔의 <<폴로네즈 춤을 추는 폴란드인들>>

 

④쇼팽이 1842년에 작곡한 폴로네즈 악보.

 

/자료 제공: ‘인문학이 뭐래? 알면 들리는 클래식’(햇살과나무꾼 지음ㆍ한울림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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