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은 조선 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입니다. 일명 남대문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398년(태조 7)에 세워졌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쯤에 방화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2층 누각의 90%, 1층 누각의 10% 정도가 소실되었다. 이후 2010년 2월에 숭례문복구공사를 시작한 이래 2013년에 완공되어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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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호 서울 숭례문
국보 1호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1398년(태조 7)에 세워졌습니다.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정남향이 아니라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데, 정남쪽에는 남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남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지점에 지어졌죠. 한양도성은 북악산ㆍ낙산ㆍ남산ㆍ인왕산을 연결해 약 18km에 이르는 성곽인데, 그 정문이 숭례문입니다. 
한양도성의 4대문은 이름을 정할 때 유교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활용했는데, 남문인 숭례문은 ‘예(禮)를 품고 있고 예의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보물 1호 흥인지문과 비교하는데, ‘왜 숭례문은 국보이고, 흥인지문은 보물일까?’라는 궁금증 때문일 겁니다. 
두 문은 모두 1398년(태조 7)에 처음 세워졌습니다. 숭례문은 여러 차례 고쳐 지었고, 흥인지문은 1869년(고종 6)에 완전히 다시 지었죠. 즉 숭례문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흥인지문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숭례문을 더 높이 평가했던 겁니다. 
태조 때 건립된 이후 숭례문은 여러 차례 수리됩니다. 50년 후인 1448년(세종 29)에 첫 번째 보수공사가 있었고, 1479년(성종 10)에도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고요. 1868년(고종 5)에도 각 성문을 차례로 수리하라는 전교에 따라 수리 공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898년(고종 35)에는 숭례문 홍예를 관통하는 전차 선로(종로~용산)가 놓였고, 1904년(고종 41)에 서대문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선로가 숭례문 앞에 놓입니다. 이후 숭례문 구역의 복잡한 교통 상황을 빌미로 숭례문 성곽을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으며, 1907년에 ‘성벽처리위원회’가 구성되고 1909년에는 마침내 성곽이 철거되고 말았죠. 조선의 수도를 감싸는 한양도성의 성곽이 허물어지게 된 것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문루 2층 2곳, 문루 1층 3곳, 축대 1곳 등이 훼손되면서 1953년에 긴급 보수를 했습니다. 1961년에는 대대적인 해체 수리가 있었고요. 2006년에는 숭례문 남쪽에 광장을 설치하여 일반인들이 숭례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숭례문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설연휴 마지막 날 밤 토지 보상에 불만은 품은 한 노인이 숭례문에 불을 붙여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서울에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었던 숭례문은 2층 문루의 90%, 1층 문루의 10%를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잃었습니다. 1984년의 보물 476호 화순 쌍봉사 대웅전 화재와 같은 전소는 피했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이 사람은 2006년 창경궁 문정전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는 다행히 초기에 화재를 진압했지만, 사후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숭례문의 비극은 없었을까요?)

화재로 불탄 숭례문을 복원하기 위해 석재를 가공하고 있다.

 

2008년 5월에 정부는 숭례문 복구 기본원칙을 세우고 구조 안정성 평가 등 기초 연구를 진행, 2010년 복원 공사를 시작합니다. 성곽에 쌓을 돌, 문루 복구에 활용할 목재와 기와를 전통 기법으로 제작하고 복구에 활용했으며, 2013년 5월 복원된 숭례문이 공개되었습니다. 이때 한양도성의 남문이었던 숭례문의 취지를 살려 소실된 문루뿐 아니라 성곽 일부도 복원했습니다

 


숭례문은 언제 국보 1호가 되었을까요?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문화재를 지정했을까요? 정답은 일제 강점기입니다. 조금 놀랍죠? 우리 문화재를 일본이 지정하고 관리했다니 말이죠. 1933년 일제는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조령’을 공포하고, 그 이듬해인 1934년에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을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물만 있고, 국보가 없잖아요. 일본은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문화재를 자기네 문화재 보다 낮춰 본 거죠. 그래서 보물로만 지정했던 겁니다. 1934년에 지정된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 보물 2호는 경성 동대문이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직접 문화재를 지정한 것은 언제일까요? 광복을 맞은 1945년? 정답은 1955년입니다. 광복 후 10년이 지나서야 ‘국보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회’를 발족하고 국보 367건, 고적 106건, 고적 및 명승 3건, 천연기념물 116건을 지정했죠. 물론 남한에 있는 문화재를 대상으로 했고요. 이때 지정된 국보 1호는 서울 남대문, 국보 2호는 서울 동대문입니다. 
1955년에는 동대문도 국보였네요. 지금처럼 국보와 보물로 나누어 문화재를 지정한 것은 1962년부터입니다.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고 국보 1호는 서울 남대문, 보물 1호는 서울 동대문으로 지정했죠. 1997년에는 일제 강점기에 지정된 문화재들을 검토하면서, 원래 이름이었던 숭례문과 흥인지문이라는 명칭을 되찾았고요. 
 

국보 하브루타
이런 건 어때요?

‘국보 1호 서울 숭례문’이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바뀐 이유는?
숭례문이 화재로 피해를 입기 전에도 국보 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숭례문보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등을 국보 1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문화재청은 국보의 지정번호는 문화재의 가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관리번호에 불과하므로 국보 1호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08년 화재 이후에도 숭례문의 국보 자격은 유지되었죠. 하지만 2021년 11월 국가지정ㆍ등록문화재를 표기할 때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시행되면서 더 이상 지정번호를 쓰지 않게 되었어요. 이에 따라‘국보 1호 서울 숭례문’이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표기가 바뀌게 되었습니다.‘보물 1호 서울 흥인지문’도 ‘보물 서울 흥인지문’으로 표기합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가족과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숭례문 현판 글씨는 누가 썼을까요?
한양도성의 다른 문들과 달리 숭례문의 현판은 세로로 쓰여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세로로 현판을 썼다고 전해지는데요. 현판은 세로 3.5m, 가로 1.5m로 무게가 150kg에 달합니다. 숭례문 화재 때는 현판이 10여 미터 아래로 떨어지면서 아찔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죠. 화재에도 불구하고 현판의 글씨 부분은 살아 남았지만 복원이 필요했습니다.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보는 150여 년 전에 숭례문 현판을 탁본하여 서울 상도동에 있는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에 보관했습니다. 숭례문 현판을 복원할 때 이 탁본을 활용했고요. 그런데 누가 숭례문 현판 글씨를 썼는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숭례문 현판 글씨를 썼을까요? 
다음의 기록들을 읽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한양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고 하는데,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
- 이수광(1563~1628) <<지봉유설>>, 이긍익(1736~1806) <<연려실기술>>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편액은 세상에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하지만 사실은 정난종이 쓴 것이다.”
- 이규경(1788~1856) <<오주연문장전산고>>

“숭례문 글씨는 신장 혹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전해왔는데 숙종 때 문을 수리하다 보니 대들보에 유진동의 글씨라고 적혀 있어 이제까지 구전으로 전한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 남태응(1687~1740)<<청죽만록>>

가족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질문들을 적어보세요

/자료 제공=‘하브루타 국보여행’(최태규 지음ㆍ글로세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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