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이산을 만나다
김홍도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건 잘 알지? 그는 조선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 대표 화가로 꼽힐 만해.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니까.
김홍도는 태어난 해와 고향이 분명하지 않은데, 경기도 안산에서 나고 자랐을 가능성이 커. 당시 안산에는 당대의 으뜸 화가 강세황이 살았는데,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그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거든. 집안이 볼품없고 가난했던 김홍도가 강세황의 눈에 띄었다는 건 일찌감치 그림 실력으로 소문이 난 덕분이었을 거야. 
어느 날, 도화서 화원 김응환이 강세황을 찾아왔어.
“선생님, 앞으로 도화서에 일손이 부족할 거 같은데, 제가 후배로 가르치면서 화원으로 키울 만한 인재가 없을까요?”
강세황은 그림 몇 점을 보여 주었어. 찬찬히 그림을 살펴보던 김응환은 눈을 점점 크게 뜨다가 말했어.
“이 그림의 임자는 이미 제가 가르칠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보다 어린 화가를 소개해 주십시오.”
강세황이 웃음을 띠고는 대답했지.
“틀림없이 자네보다 서너 살은 어릴걸세.”
김응환은 깜짝 놀랐어. 김응환도 십대에 도화서에 들어간 천재였는데 그림의 주인은 솜씨가 자기보다 더 뛰어난 듯했거든.
“재주는 있지만 아직 세밀함이 부족하고 도화서 그림을 그리기엔 기초가 안 잡혀 있네. 자네가 잘 지도해 보게.”
강세황은 추천서를 써 주었고, 그길로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이 되었어. 김홍도는 도화서에서 기본기부터 다시 배웠어. 선배 김응환이 적극적으로 가르쳐 주었지. 그 후로 두 사람은 절친한 선후배가 되어 늘 같이 작업을 했어. 산수화를 잘 그렸던 김응환은 사실적인 화풍의 그림으로 김홍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대. 
1773년, 마침내 김홍도는 세손 이산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어. 세손은 김홍도보다 일곱 살이 적었지만 다음 임금이 될 위엄을 지니고 있었지. 그런 한편 아버지 사도 세자를 잃고 외롭게 자란 그늘까지 김홍도는 간파했어.

 

‘아, 저분이 왕위를 이어받으실 분이구나!’ 
김홍도가 절을 하자 세손은 엷은 웃음을 머금고 다정하게 말했어.
“김홍도라고? 표암(강세황)의 그림과 글은 기백과 기품이 있으니 그 제자 또한 마찬가지겠지.”
이렇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조선 후기의 문화 황금기를 이끌어 가게 된단다. 훗날 정조는 문집 <<홍재전서>>에서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어.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삽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김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김홍도는 세손의 초상과 영조의 어진까지 그린 어진 화사가 되었어. 영조는 그 공을 인정하여 김홍도를 종6품 사포서 감목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스승인 강세황에게도 벼슬을 내렸단다.

김홍도는 도화서의 대표 화가로서 모든 그림 작업을 주도했어.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되는 규장각 그림을 그려 바쳤고, 궁궐의 모든 행사를 그림으로 남겼어. 
김홍도는 다양한 그림에 두루 뛰어났는데, 특히 신선도를 잘 그렸대. 어느 날, 정조는 새로 하얗게 회칠을 한 궁궐 벽 앞에서 김홍도에게 말했어.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신선의 나라라 하였네. 나는 신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책으로 읽었으나 신선을 본 적은 없어. 사람들은 그대를 전생에 신선이었다고도 하고, 신선 나라에서 왔다고도 하더군. 그러니 이 벽에 신선들의 모습을 그려 보게.”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개 임금의 명을 받으면 화가들은 한동안 고민하고 연구한 다음에야 붓을 들거든. 그림을 완성하는 시간도 꽤나 길어. 구상과 준비만도 며칠이 걸리는 게 보통이었지. 그런데 김홍도는 대답한 즉시 정조가 보는 앞에서 붓을 들었어.
“그대들은 물감통과 붓통을 들고 나의 움직임에 맞추어 따라다니도록 하시오.”
내관들에게 당부한 김홍도는 관모까지 벗고 벽 앞에 섰어. 그리고 거침없이 붓을 휘두르기 시작했어. 그저 하얀 화선지 같던 벽은 순식간에 바다로 변했고, 거기에 신선들이 하나둘 자
리 잡기 시작했지. 정조를 비롯한 모든 구경꾼이 놀라 점점 입이 더 크게 벌어졌어. 김홍도의 날랜 손놀림이 지나간 곳에는 신비한 세계가 열려 갔어. 구도 잡기나 밑그림도 따로 없었어. 붓이 움직이는 순간 신비한 그림이 창조되는 것만 같았지. 커다란 벽면이 <해상군선도>란 그림으로 완성되는 데는 채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어. 바다에서는 파도 소리가 나고, 바닷바람이 불어 나와 신선들의 옷자락을 흔드는 듯했어. 바다 위에 뜬 채 얘기를 나누는 신선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지.
정조는 감탄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그대는 정말 신선 세계에서 왔나 보군.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토록 빠른 시간에 저토록 생생하게 신선들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정조는 김홍도에게 새로운 명을 내렸어.
“그대는 거리로 나가라. 과인이 궁궐에서도 백성들의 삶을 소상히 알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그려 오라.”
정조의 어명 이후로 거의 10년간 김홍도는 집중적으로 풍속화를 그렸어. 이때 탄생한 작품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남게 되었지. 김홍도가 오늘날 풍속화의 대가로 꼽히는 것도 이 시기의 활동 덕분이야. 잘 알려진 <씨름도>, <서당도>, <벼 타작>, <무동>, <대장간>, <기와 올리기> 같은 풍속화들이 이때 태어났거든. 이런 그림을 모은 <<단원풍속도첩>>은 보물 527호란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송하맹호도>와 <죽하맹호도>도 잊어서는 안 돼. 이 그림들은 세계 그 어느 호랑이 그림도 따르지 못하는 섬세함과 힘을 고스란히 보여 주거든. 

/자료 제공= ‘빛난다! 한국사 인물 100-⑨ 조선 후기: 선비들, 새 세상을 꿈꾸다’(박윤규 글ㆍ백두리 그림ㆍ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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