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창건하였다. 신림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했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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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사찰 해인사

▲ 장경판전

합천 해인사는 국보 52호 장경판전 안에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어서,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로 꼽힙니다. 삼보는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처님(佛), 부처님의 가르침(法),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僧)을 가리킵니다. 불보사찰은 양산 통도사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고, 순천 송광사는 고려 시대 16국사를 배출하여 승보사찰이 되었죠. 
해인사는 화엄십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화엄십찰은 의상대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해인사는 의상대사의 손제자 순응 스님이 802년(애장왕 3)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정화상이 마무리했습니다. ‘해인사’라는 절 이름도 <<대방광불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
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에서 따 왔을 정도로 화엄 사상의 중심 사찰입니다. 
스님으로는 드물게 좌상의 주인공이 된 희랑대사도 해인사에서 화엄사상을 펼쳤습니다. 희랑대사는 고려가 후백제와 경쟁할 때 태조를 도왔으며, 태조는 그 보답으로 해인사를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고 크게 중건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전란의 화마를 피해갔지만, 이후 1695년부터 1871년까지 일곱 차례의 크고 작은 화재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1817년 대화재 때
는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해인사를 중건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추사가 쓴 1818년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에 나타납니다.

국보32호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불경은 경(經), 율(律), 논(論)으로 구성됩니다. 경과 율은 석가모니가 말하고 제정한 설법과 계율입니다. 경은 석가모니 입멸 후, 그의 수행비서였던 아난존자가 상정한 내용을 장로들이 확정한 것이죠. 율은 석가모니 제자 가운데 계율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우바리존자에 의해 정리되었고요. 마지막으로 논은 경과 율에 대한 고승들의 다양한 해석과 연구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된 산스크리트 경전들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한문으로 번역됩니다. 처음에는 번역한 불경들을 필사해서 전했고,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목판대장경이 제작됩니다. 첫 목판대장경은 북송 태조 때인 972년 만들기 시작하여 983년에 완성한 북송 관판대장경입니다. 뒤이어 고려에서도 대장경을 판각하는데요. 거란의 침입을 불심의 힘으로 막고자 1011년(현종 2)부터 1087년(선종 4)까지 6대 76년 동안 작업한 초조대장경입니다. 이어 대각국사 의천은 1100년에 초조대장경을 보완하는 속장경을 제작하고요. 안타깝게도 두 대장경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초조대장경을 잃은 고려 조정은 대몽항쟁의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기로 결정합니다. 1237년부터 본격적으로 판각을 시작하여 1248년 마무리 지었고, 1251년에 대장경의 완성을 대내외에 알립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국력을 쏟아 대장경을 간행한 이유는 부처님의 힘을 빌려 몽골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었죠. 또 전란으로 고통받고 최씨 정권에 대한 불만을 키우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81,352매에 이르는 팔만대장경은 거의 똑같은 크기와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해인사 대장경판

경판 하나의 크기는 대체로 가로 70cmㆍ세로 24cmㆍ두께 2.8cm이고, 앞뒤 양면에 면마다 23줄, 줄마다 14글자를 새겼습니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에 현존하는 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가장 정밀하고 오탈자가 없기로 유명합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국보 52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대장경판(팔만대장경)이 지금까지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이유는 국보 52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판의 특성상, 팔만대장경 보존을 위해서는 적정한 온도와 습도의 유지, 직사광선 차단, 원활한 통풍과 환기가 중요한데, 장경판전은 이를 모두 만족시키고 있죠.
장경판전은 바닥 습기를 막기 위해 배수가 잘되는 토질 위에 세웠고, 습기를 빨아들이는 석회ㆍ숯ㆍ소금을 겹겹이 넣고 황토로 바닥을 마감했습니다. 건물의 방향과 살창 구조, 경판을 올려두는 판가를 통해 필요한 햇빛의 양을 조절하고요. 특히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앞면 살창은 위쪽이 작고 아래쪽이 크게, 뒷면 살창은 위쪽이 크고 아래쪽이 작게 만들어 환기와 통풍을 원활하게 해줍니다. 장경판전은 남북의 기다란 두 건물, 수다라장과 법보전, 그리고 동서의 작은 두 건물, 동사간고, 서사간고로 이루어집니다. 수다라장과 법보전에 ‘팔만대장경’이 봉안되어 있고, 동ㆍ서 사간고에는 팔만대장경 이전에 판각된 고려목판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장경판전이 언제 건축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올 무렵 신축되었을 겁니다. 장경판전은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해인사가 왜 법보사찰인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장경판전의 가치를 인정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죠. 세계문화유산 속에 세계기록유산이 보관되어 있는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 
 

국보하브루타
이런건어때요?

고려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도 고려 때 만들어졌죠. ‘활자(活字)’는 ‘살아있는 글자’라는 의미입니다. 왜 죽은 글자(死字)가 아니라 산 글자(活字)일까요? 이는 이전의 목판인쇄와 달리 글자를 재조합해서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판인쇄는 나무에 새긴 대로만 내용을 인쇄할 수 있지만, 금속활자는 글자를 옮겨 배열하면 다양한 내용을 인쇄할 수 있었죠.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가 만들었습니다. 금속활자는 포도주 제작공정에서 사용했던 프레스기를 응용하여 대량인쇄가 가능했죠. 우리나라의 인쇄술, 직지심체요절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대해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가족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질문들을 적어보세요.

 

/자료 제공=‘하브루타 국보여행’(최태규 지음ㆍ글로세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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