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한다’. 이 말의 의미를 여행을 떠나본 사람들은 안다. 이 코너는 한마디로 초등학생 두 딸을 둔 현직 초등학교 선생님이 소개하는 국보여행기이다. 단,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하브루타를 통해 미리 궁금한 것을 알아보고, 대화하고, 토론한 다음 여해을 떠나야 한다. 글을 읽으며 대화의 즐거움과 여행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껴보자.

 

익산 미륵사지
백제 제30대 무왕 때 창건한 사찰로 미륵하생신앙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는 <<삼국유사>>를 토대로 무왕 때 창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초 승려인 혜거국사 비문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 때에 미륵사탑이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지에서는 고려 시대의 유물과 유구가 많이 출토되어 이 시기까지도 절이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국보 맛보기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의 창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서동요’로 유명한 서동, 즉 백제의 무왕 때 왕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무왕이 사자사에 가면서 용화산(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큰절을 올렸다. 이에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워주십시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라고 청하여 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 이에 미륵삼존상을 만들고 전(금당)과 탑과 낭무(회랑)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진평왕은 각종 기술자를 보내 이 역사를 도와주었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복원하기 위하여 해체하던 중 기단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굴되었는데, 그중 사리봉안기에는 백제의 왕후가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라고 나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유물의 기록이 다를 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역사학자 유홍준은 두 기록을 합쳐서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 창건을 시작했고, 후비인 사택적덕의 딸이 마무리했다고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운데 목탑 또는 동탑의 사리장엄구에 선화공주의 발원을 기록한 사리봉안기가 적혀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만큼 미륵사는 대찰이었습니다.

▲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전(왼쪽)과 복원된 후(오른쪽)의 모습.
▲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전(왼쪽)과 복원된 후(오른쪽)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이며,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죠.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3탑 3금당의 삼원일가람 형식입니다. 이는 일반적인 백제 사찰의 형식인 1탑 1금당의 가람배치와 다르죠. 미륵사는 미륵삼존을 위해 창건했고, 또 미륵불은 세 차례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3탑 3금당 형식이 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국보 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14.24m) 가장 오래된 석탑이며, 3탑 중 서탑에 해당합니다. 가운데 목탑과 동탑은 전하지 않는데, 서탑에 앞서 동탑은 서탑을 고증하여 복원했습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했습니다. 그래서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석탑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원래의 탑은 9층탑일 것으로 보고 있는데, 탑의 동북쪽이 6층까지 남아 있었고 거기까지 복원을 했습니다. 9층탑 원래의 높이는 상륜부를 포함하면 26m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총 1627개의 부재를 짜맞춰 재건한 미륵사지 석탑은 옛 부재의 81%를 살려 복원했습니다. 옛 부재와 새 부재의 비율은 65% 대 35%이고요. 2001년 해체 시작부터 2019년의 준공식까지 1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이는 단일 문화재로는 가장 오랫동안 수리한 기록입니다. 
 


국보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는 사적 301호로 지정되었고, 1942년 절터 발굴 시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정림사’라는 이름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정림사는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대평 8년) 당시에 쓰이던 이름이고, 백제 시대의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정림사지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국보 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중국 역사서인 <<북사>>의 <백제전>에는 ‘寺塔甚多(사탑심다)’라는 기록이 있어, 백제의 절에 탑이 굉장히 많았었다고 전합니다. 미륵사지 석탑은 많은 부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이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에 비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적은 부재를 활용하면서 석탑으로 한 단계 더 진화한 모습을 보여주죠. 국보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8.33m이며, 기단부는 단층입니다.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부터는 높이가 반으로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늘씬해 보이면서 상승감을 느낄 수 있고요. 몸돌의 모서리 기둥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이는 목조 기둥의 배흘림 수법을 보여줍니다.

▲ 국보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 국보 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한때 ‘평제탑’이라고 불렸고,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세운 것으로 잘못 알려졌습니다. 1층 몸돌 한쪽에 ‘大唐平濟國碑銘(대당평제국비명)’이라고 새겨져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는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미 세워져 있던 탑에 새긴 것입니다.


국보 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익산 왕궁리는 옛 궁터였습니다. 백제 무왕의 별궁이 있었다고 하고, 조선 후기의 익산읍지 <<금마지>>에는 “마한 때의 조궁(朝宮)터라는 성터가 남아 있다”고 나오죠. 국보 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충실히 계승했습니다. 왕궁리 절터는 백제 무왕의 별궁이 있던 곳인데 폐궁되면서 사찰이 들어섰고, 처음에 세웠던 목
탑을 대신해 목탑의 심초석 위에 석탑을 세웠다고 보는 것입니다. 목탑이 석탑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죠. 

▲ 국보 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 국보 289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은 높이 8.5m이며, 1단의 기단 위에 1층 몸돌은 모서리 4장과 동서남북 중간 면석 4장을 합쳐 세웠습니다. 2층은 4면 각 1장, 3층부터는 돌을 2장씩 합쳐서 세웠고요. 지붕돌의 경우 1~3층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4장씩 모두 8장의 돌을 이용했고, 4~5층은 윗면과 밑면에 각각 2장씩 모두 4장의 돌을 조립했습니다. 
 


/자료 제공=‘하브루타 국보여행’(최태규 지음ㆍ글로세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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