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조선의 황금시대를 열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 덕분에 안정된 기반에서 나랏일을 할 수 있었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이 나랏일에 익숙해지도록 4년 동안 뒷받침을 해 주다가 숨을 거두었거든.
세종의 정치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즉 애민 정신에서 출발해. 세종은 언제나 백성들과 관련된 일은 자세히 조사하고 의견을 충분히 물은 다음 백성에게 이로운 결론을 내리곤 했어. 그 당시에도 철저한 여론 조사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기까지 했으니 매우 민주적이었지.
무엇보다도 세종은 백성들이 밥을 굶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게 하고 싶었어. 논밭을 늘리도록 장려하였고, 농사짓는 법을 설명한 책인 <<농사직설>>을 펴내 전국에 나누어 주었지.
당시 환곡이란 제도가 있었거든. 봄에 쌀이 떨어지면 관청에서 곡식을 빌린 다음 가을에 추수한 뒤 갚는 제도야. 그런데 몇 년 동안 흉년이 이어지자 환곡을 갚지 못해 빚이 크게 불어난 백성이 많았어. 세종은 그렇게 불어난 빚은 받지 말라는 명을 여러 번 내렸어. 관청에서 환곡을 꼭 받아야 한다고 자꾸 요청하니 단호하게 명령했어.
“몇 년 흉년 끝에 한 번 풍년이 왔다고 밀린 환곡을 다 받으면 백성들은 또다시 흉년을 당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라 살림이 좀 어렵더라도 밀린 환곡을 받지 말라.”
공부를 좋아하는 세종은 학문을 크게 장려했어. 학문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확대하여 학문이 뛰어난 관리를 집현전 학사로 삼아 학문 연구에 전념하도록 지원했지. 또 경연을 자주 열었어. 경연이란 왕과 신하가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는 자리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제도야. 세종은 과학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어. 서운관이란 관청에서 천문학과 과학을 연구하게 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계들을 발명해 냈어. 혼천의라는 천체 관측 기구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등을 만들었지.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를 발명하여 홍수에 대비하고 농사에 도움을 준 건 세계 최초의 일이야. 
서운관에서는 장영실이 큰 활약을 했는데, 그는 지방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던 노비 출신이야. 이처럼 재능이 있으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뽑아 활용했지. 밖으로는 국방도 튼튼하게 다졌어. 이종무를 남쪽으로 보내 쓰시마섬(대마도)을 정벌해서 왜구들이 설치지 못하게 하고, 최윤덕과 김종서를 북쪽으로 보내 여진족이 노략질을 못하게 대책을 세웠지. 
지극한 효자였던 세종은 효도를 권장하고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만들었어. 경로잔치를 자주 열어 노인들을 대접했고, 90세가 되면 나라에서 쌀을 내려 주었어. 100세가 넘은 노비는 면천을 시켜 주기까지 했지. 당시엔 노비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생활이 가장 고달팠거든. 세종은 노비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주인들을 단속했어. 여종이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130일의 출산 휴가를 주고 그 남편한테도 30일 휴가를 주라고 했으니, 오늘날의 제도보다 나을 정도였지. 

 

세종의 따뜻한 손길은 감옥의 죄인들에게까지 다가갔어. 여름에는 물을 자주 갈아 주어 씻을 수 있도록 하고, 겨울에는 짚을 두껍게 깔아 춥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어. 어느 해 몹시 더운 여름날 세종은 이런 명령을 내렸어.
“날이 몹시 더우니 활인원의 병자와 의금부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서빙고의 얼음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여름날 얼음은 무척 귀해서 왕족과 대신들한테만 주었거든. 세종이 이렇게 명한 이후로 병자들과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주는 게 법으로 정해졌대. 비록 죄인일지라도 세종은 자기 자식 같은 백성으로 여긴 거지. 이렇듯 나라를 안팎으로 알뜰하게 보살피니 조선은 태평성대라 불렸어. 논밭과 백성은 늘어나고 문화는 발달하고 국방은 안정되어 평화로웠지. 세종이 30여 년 동안 해낸 수많은 업적들은 조선이 500년을 이어 갈 수 있는 바탕과 힘이 되었어. 하지만 이 모든 일보다 더욱 위대한 업적은 바로 한글을 만든 일이야.


/자료 제공= ‘빛난다! 한국사 인물 100-⑦ 조선 전기: 문화가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박윤규 글ㆍ순미 그림ㆍ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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