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사하로프
(1921~1989)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이 사하로프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이 사하로프

 

노재미 선생님 : 얘들아, 원자폭탄보다 더 위력이 센 폭탄이 있어. 뭔지 혹시 아니?

오디 : 혹시…… 수소폭탄 아닌가요?

노재미 선생님 : 그래. 정답이야! 그런데 수소폭탄은 실험만 이뤄졌을 뿐 인류 역사상 이제껏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지. 사용 자체가 인류 공멸을 의미할 정도로 위력이 강하기 때문이야. 그럼 수소폭탄을 최초로 개발한 국가는 어느 나라일까? 

세이 : 제일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한 국가가 미국이니까 수소폭탄도 미국 아닐까요?

노재미 선생님 : 맞아. 미국 과학자들이 1952년 11월 태평양의 한 섬에서 최초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지. 하지만 그 실험은 실험실용 모델일 뿐이었어. 수소폭탄의 크기가 3층짜리 주택만한 데다가 무게도 54톤에 달해 전쟁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거든.

오디 : 잠깐만요. 그런데 수소폭탄처럼 무서운 무기가 노벨상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노재미 선생님 : 잘 들어봐. 미국이 수소폭탄을 개발한 지 1년 후 소련도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거든. 그런데 소련이 개발한 수소폭탄은 무게가 7톤에 불과해 폭격기에 탑재가 가능했어. 이로 인해 소련은 원자폭탄 개발에 뒤처져 있던 미국과의 경쟁을 단숨에 역전시킬 수 있었던 거야. 이 수소폭탄을 개발한 사람은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이 드미트리예비치 사하로프라는 물리학자였어. 노벨상위원회는 이처럼 인류 최악의 무기를 개발한 그에게 1975년 노벨상을 안겼어. 그것도 물리학상 같은 과학 분야가 아닌 평화상을 말이지. 
 
세이 : 평화상을 받은 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노재미 선생님 : 일단 사하로프가 개발한 수소폭탄부터 설명해줄게. 잘 들어봐. 사하로프는 플루토늄 기폭장치를 한 지점이 아니라 여러 층으로 넣는 방안을 제시해 운반 가능한 소형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어. 그건 인류 최초의 실용적인 수소폭탄이라고 할 수 있었지. 
 

 

 

세이 : 실용적인 수소폭탄이라고요?

▲1952년에 있었던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의 위력.
▲1952년에 있었던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의 위력.

 

노재미 선생님 : 그가 개발한 수소폭탄은 1953년 8월 12일 카자흐스탄 동부에 위치한 넓은 초원지대인 세미팔라틴스크에 들어선 실험용 세트장에서 처음 실험이 진행됐단다. 주택과 공장 등 인공 구조물이 설치된 그 세트장에는 개와 말, 양과 같은 동물이 활보하고 탱크와 대포, 전투기 등의 무기도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지. 거기에 수소폭탄을 폭발시키자 반경 4킬로미터 내에 있던 모든 동물과 건물, 무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물론 넓은 평원이 재로 뒤덮여버렸다고 해. 당시 소련을 이끌던 스탈린은 그에게 직접 최고 부자만이 가질 수 있는 별장을 선물하기도 했단다. 

세이 : 하지만 노벨상은 의미가 다르잖아요. 이런 과학자에게 노벨상을 주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노재미 선생님 :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단다.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 당시 수 킬로미터 밖에 있던 새 떼마저 모두 까맣게 변한 것을 목격한 사하로프는 점차 자신이 개발한 무기가 많은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어. 그래서 이후 그는 소련 정부를 향해 공개적인 석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양심수의 석방을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한 거지. 

오디 : 와, 멋져요! 그런데 소련이 그런 활동을 하는 사하로프를 가만히 두었을까요?

노재미 선생님 : 아니. 소련은 그에게 줬던 특권과 직책을 모두 박탈한 뒤 모든 중요한 일에서 물러나게 했어. 그럼에도 사하로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와 인권을 위해 활동한 결과, 마침내 197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거지. 

오디 : 어쩐지 뭔가 반전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노벨상을 받은 건가요?

 노재미 선생님 : 하지만 소련 정부의 출국 금지로 사하로프는 노벨상을 받으러 갈 수 없었단다. 대신 그의 부인이 노벨상 시상식장에 참가했지. 그의 부인은 시상식에서 “공산권 국가들의 모든 양심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과 함께 영광을 나눈다”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고 해. 그 후 1979년 말에 행해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사하로프가 공개적으로 항의하자, 결국 소련 정부는 그를 거리에서 체포해 고르키로 유배를 보내버렸어. 그곳에서 그는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이들과의 만남이 금지된 채 7년을 살아야 했지.

세이 : 7년씩이나요? 그럼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건가요?

노재미 선생님 : 그곳에서 회고록 작성과 단식 투쟁 등으로 소련 정부에 맞서던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은 1986년 말에서야 부인과 함께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단다. 이후에도 줄곧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유배에서 풀려난 지 3년 후인 1989년 12월 안타깝게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모스크바에서 행해진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방문할 정도였지. 그리고 유럽의회는 그를 기리는 ‘사하로프 인권상’을 제정해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단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이 수상한 이 상은 현재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권상이지.

/자료 제공:‘20가지 재미있는 노벨상 이야기’(이성규 지음ㆍ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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