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하버
(
1868~1934)
 

▲ 카를 보슈와 함께 질소비료 제조에 큰 공헌을 한 프리츠 하버.
▲ 카를 보슈와 함께 질소비료 제조에 큰 공헌을 한 프리츠 하버.

 

노재미 선생님 : 이번 시간에는 인류를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한 과학자이자 인류에게 가장 잔혹한 발명을 한 과학자를 소개할까 하는데 어떤 이야기부터 해줄까?

세이 :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선과 악을 오가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이야기가 생각나는데요? 

오디 : 저는 무조건 좋은 내용부터요! 인류에게 선물한 내용부터 먼저 듣겠습니다.

노재미 선생님 : 이번에 이야기할 주인공은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야. 이 사람은 ‘공기에서 빵을 만든 과학자’로 잘 알려져 있지. 그가 개발한 암모니아 합성법이 식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켜 인류를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줬거든.

오디 : 공기에서 빵을 만들었다고요? 

노재미 선생님 : 선생님 이야기 잘 들어봐. 식물이 땅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탄소ㆍ수소ㆍ산소ㆍ질소 등이 필요하거든. 그중 탄소ㆍ수소ㆍ산소는 물과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에서 얻을 수 있는데, 대기 중에 가장 흔한 성분인 질소는 식물이 직접 흡수하지 못하고 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단다. 농부들이 퇴비나 동물의 배설물을 흙에 뿌린 건 식물에 질소를 공급하기 위해서였지.

세이 : 그렇다면, 프리츠 하버가 비료를 손쉽게 쓸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했다는 건가요?

▲ 하버는 질소 비료 제작에도 공헌했지만, 독가스를 제조해 전쟁에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 하버는 질소 비료 제작에도 공헌했지만, 독가스를 제조해 전쟁에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노재미 선생님 : 맞아! 프리츠 하버는 1904년 대기 중에 있는 막대한 양의 질소를 암모니아 형태로 결합하는 연구를 시작했어. 그 암모니아를 다시 질산칼륨으로 전환하면 질소 비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 하버는 공업화학자 카를 보슈와 협력해 암모니아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단다. 이 공로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고, 암모니아를 대량 생산하는 데 필요한 새 화학 공정을 함께 개발한 카를 보슈는 1931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지.

세이 : 선생님, 그런데 프리츠 하버가 발명한 질소 비료가 어떤 면에서 인류에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노재미 선생님 : 음, 현재 전 세계의 농경지에 뿌려지는 질소 비료의 약 40퍼센트가 하버-보슈법을 통해 만들어진 거야. 전 인류가 섭취하는 단백질 가운데 3분의 1이 질소 비료에서 나왔고. 다시 말해 질소 비료가 없었다면 현재 인류의 절반이 굶주리게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가 되겠지? 이제 그의 발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겠니?

 
오디 : 그런데 선생님, 이 과학자가 인류에게 가장 혹독한 짓도 했다는 건 무슨 이야기죠?

▲ 프리츠 하버가 사용했던 암모니아 제조 기구.
▲ 프리츠 하버가 사용했던 암모니아 제조 기구.

 

노재미 선생님 : 그가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한 암모니아는 식량 부족을 해결한 일등공신이기도 하지만, 폭약을 생산할 수 있는 재료가 되기도 했거든. 

세이 : 노벨도 화약을 발명했잖아요. 그걸 발명했다고 해서 그게 인류에게 나쁜 짓을 한 거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요?

노재미 선생님 : 사실은 더 큰 이유가 있단다.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용 독가스를 개발하는 비밀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 세계 최초의 독가스 공격에 성공한 인물이었어. 1915년 4월 22일 벨기에의 이프르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독일군이 벌인 전투에서였지.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 진지를 향해 집중 포격을 가한 후 약 6000개에 달하는 가스통을 열어 염소 가스를 살포했어. 그걸로 약 5000명의 연합군 병사들이 염소 가스에 폐가 망가져서 사망했고, 1만 5000명이 가스에 중독됐지. 

세이 :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주변에서는 하버의 나쁜 행동을 말리지 않았나요?

노재미 선생님 : 프리츠 하버의 아내 역시 화학자였어. 그런데 아내는 평소 독가스를 만드는 하버의 활동에 반대하다가 결국 이프르 전투 직후인 그해 5월 2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지. 하지만 독가스 공격은 멈추지 않았단다. 이후 염소 가스보다 실전에 사용하기 훨씬 편리한 포스겐 가스 등을 개발해 ‘독가스의 아버지’ 혹은 ‘화학 무기의 아버지’로 불렸어.
 
세이 : 듣고 보니 같은 발명품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정말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거 같아요.

노재미 선생님 : 맞는 얘기구나. 어쨌든 그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가스 등의 화학 무기로 사망한 병사는 약 10만 명에 달했고, 10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가스 중독으로 후유증을 앓아야 했단다.

세이 : 그런데 선생님, 제1차 세계대전이면 혹시 프리츠 하버가 노벨상을 받기 이전 아닌가요?

노재미 선생님 : 독일의 패전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전범으로 분류돼 스위스로 피신해야 했어.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노벨상위원회는 그에게 화학상을 줬고, 1919년에 다시 독일로 귀환했단다. 그는 출세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독일인보다 더 독일인답고 싶어 했어. 그래서인지 노년은 그리 좋지 못했단다. 시간이 지나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잡으면서 유대인이었던 하버 역시 설 곳을 잃어갔지. 그러다 1934년 이스라엘에 새로 설립되는 연구소로부터 초청을 받아 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지.

오디 : 결국은 그렇게 죽을 것을. 쯧쯧, 좀 착하게 살지! 

노재미 선생님 : 독일을 사랑했던 그의 소원은 자신의 묘비에 “전쟁 때나 평화로울 때나 조국이 허락하는 한 조국에 봉사했다”라는 문구를 남기는 것이었다고 해. 하지만 결국 독일에 버림받았던 그는 유일한 소원조차 이루지 못한 채 낯선 이국땅인 스위스의 바젤이라는 곳에 묻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단다.


/자료 제공:‘20가지 재미있는 노벨상 이야기’(이성규 지음ㆍ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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